전조 (오호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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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조(前趙)는 304년 흉노 출신 유연이 건국한 오호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유연은 서진의 혼란을 틈타 한(漢)을 건국하고, 311년에는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서진을 멸망시켰다. 유총 시기에 화북 지역을 장악했지만, 유요와 석륵 등 군벌의 독립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유총 사후, 유요가 황제가 되어 국호를 조(趙)로 변경하고 흉노 민족주의를 강화했으나, 329년 석륵에게 멸망했다. 전조는 한나라를 계승하려 했으나, 멸망 후 흉노의 후예를 자처하며 묵돌선우를 숭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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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오호 십육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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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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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명 (304–319) | 한 (漢) |
국명 (319–329) | 조 (趙) |
일반 명칭 | 한-조 (Han-Zhao), 전조 (Former Zhao) |
지위 | 제국 |
정치 체제 | 군주제 |
존속 기간 | 304년 – 329년 |
건국 사건 | 유연의 황제 칭호 주장 |
건국 날짜 | 308년 11월 2일 |
국호 변경 | 한에서 조로 국호 변경 |
국호 변경 날짜 | 319년 |
멸망 사건 | 석륵에 의한 유요의 포획 |
멸망 날짜 | 329년 1월 21일 |
위치 | 중국 |
수도 | |
수도 (304–305) | 이석 |
수도 (305–308) | 이정 |
수도 (308–309) | 포자 |
수도 (309–318) | 평양 |
수도 (318–329) | 장안 |
수도 (329) | 상규 |
종교 | |
주요 종교 | 텡그리 신앙, 불교 |
정치 | |
황제 | 유연 (304–310) 유화 (310) 유총 (310–318) 유찬 (318) 유요 (318–329) |
대표 | 유희 (329) |
이전 국가 | 서진 |
이후 국가 | 후조 |
면적 | |
면적 (316년) | 2,000,000 km² |
2. 역사
후한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와 선비족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병주(지금의 산서성 일대)에 정착하여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번병(藩屛)의 역할을 하였다. 3세기 말, 팔왕의 난이 일어나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남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은 서진 황족들의 권력다툼에 용병으로 개입하면서 독립을 모의하게 되었다.
업의 성도왕 사마영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유연은 사마영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사마영을 속이고 업에서 빠져나와 흉노의 거주지인 병주로 향했다. 304년 병주 서하군의 이석에서 흉노의 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며 자립한 유연은 그해 10월에 '''한'''(漢)을 건국하였다. 유연은 아들 유총과 친족인 유요, 갈족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 중남부를 점령하고 서진의 수도 낙양을 압박하였다. 308년에 유연은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해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를 사로잡았다('''영가의 난'''). 장안에서 민제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에 장안을 함락시키고 민제도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 유찬이 뒤를 계승했으나 외척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장안의 유요와 하북의 석륵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하였으며, 유요는 죽은 유찬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에 봉하였다. 12월에 석륵이 평양을 점령하여 반란을 제압하였으나 319년에 유요가 석륵을 공격함으로써 유요와 석륵 두 군벌은 공식적으로 결별하였다. 유요는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묵돌선우의 후계자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으며, 석륵은 11월에 양국에서 조왕으로 즉위하였다('''후조''').
2. 1. 건국 배경
후한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와 선비족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는 대거 병주(지금의 산서성 일대)에 정착하여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번병(藩屛)의 역할을 하였다. 흉노 엘리트들은 한화되었지만, 여전히 중국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유지했다.[7] 서진의 통치에 대한 불만과 종속적인 지위는 흉노족으로 하여금 독립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3세기 말, 팔왕의 난이 일어나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남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은 서진 황족들의 권력다툼에 용병으로 개입하면서 독립을 모의하게 되었다.삼국 시대의 위는 흉노나 선비 등 주변 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후한 말기에 복속한 남흉노의 선우의 후손인 유연은 서진으로부터 흉노의 오부대도독에 임명되었다.
서진에서는 290년 4월에 사마염(무제)이 붕어하자 황족에 의한 내분, 이른바 팔왕의 난이 일어났다. 유연은 흉노의 병력을 이용하려던 성도왕 사마영에 의해 업에 머물게 되었다.[14] 그러나 팔왕의 난이 격화되자 흉노 내부에서는 자립을 꾀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유연의 종조부인 유선은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했다.[14] 304년 8월, 유연은 리석에서 대선우를 칭하고 자립했다.[15] 10월에는 한왕을 자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워 사실상 독립하여 한(전조)을 건국했다.[15]
2. 2. 유연의 건국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남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은 서진 황족들의 권력 다툼에 용병으로 개입하면서 독립을 모의하게 되었다.[14]업의 성도왕 사마영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유연은 사마영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사마영을 속이고 업에서 빠져나와 흉노의 거주지인 병주로 향했다. 304년 병주 서하군의 이석에서 흉노의 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며 자립했다.[15]
그 해 말, 유연은 스스로를 "한왕(漢王)"이라고 선포했는데, 이는 한 고조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칭호였다.[15] 유연은 흉노와 한나라의 혼인 관계를 근거로 자신이 한나라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정통성을 확보하고 한족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자신의 국가를 한나라의 부흥으로 묘사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립하고 한족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15] 서한, 동한, 촉한의 황제들을 존경했고, 308년에는 스스로를 한 황제로 격상시켰다.
2. 3. 유총의 치세와 서진 멸망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를 사로잡았다(''영가의 난'').[17] 장안에서 민제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에 장안을 함락시키고 민제도 사로잡았다.[18]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유총의 치세에 한은 화북 일대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유요는 장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옹주·진주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갈 출신 석륵은 하북의 기주와 병주 북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유총의 치세에 유요와 석륵이 점령한 지방은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화되었다.기록에 따르면 유총은 폭력적인 기질을 가진 쾌락주의적인 통치자였다.[12] 만년에는 세 명의 황후를 동시에 두는 특이한 관행을 보였고, 정치 문제를 환관과 외척에게 맡겨 조정이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2. 4. 유요의 즉위와 국호 변경
劉曜|유요중국어는 318년 황제에 즉위한 후, 12월에 석륵과 협력하여 평양의 근준을 멸망시키고, 장안으로 천도하며 국호를 조(趙)로 변경했다.[12] 이때, 유요는 한나라 황제에게 제사하던 것을 폐지하고 흉노의 선우인 묵돌선우를 모셨다. 석륵은 조공(趙公)에 봉해졌지만, 319년 11월에 자립하여 상국에서 대선우·조왕을 칭하고 후조를 건국했다.[12] 이로써 화북은 서쪽의 유요의 전조(前趙)와 동쪽의 석륵의 후조(後趙)로 양분되어 대립하게 되었다.[12]2. 5. 전조의 멸망
319년, 석륵은 양국에서 조왕(趙王)으로 즉위하며 후조를 건국하고 유요와 결별하였다.[12] 유요는 저족, 강족, 구지, 전량 등을 공격하여 복속시키며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325년, 유요는 낙양 근방에서 후조와 대결하였으나 패배하였다. 328년, 낙양에서 후조와 전투를 치른 끝에 유요가 석륵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12][20] 329년, 석호가 유희를 사로잡고 전조를 멸망시켰다.[19]3. 한나라와의 관계
304년 유연은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한(漢)이라고 정하였다. 유연은 흉노와 한나라가 기원전 2세기에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을 근거로, 흉노가 한나라를 계승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전한 고제, 후한 광무제, 촉한 소열제 등을 조상으로 추존하여 제사하였다.[15]
319년 유요는 국호를 '''조'''(趙)로 고치면서 한나라 황제에게 제사하던 것을 폐지하고 흉노의 선우인 묵돌선우를 모셨다.[12] 이로써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던 흉노의 한나라는 사라지고 흉노의 후예를 자처하는 조나라가 성립되었다.
4. 통치 체제
유연은 건국 초기에는 대원수, 사공, 사도 등 중국 황실 관직을 대부분 유지하면서, 선비족의 영향을 받은 대선우 등의 관직을 도입했다. 대선우는 황제 다음가는 직위로, 비한족(非漢族) 부족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통상적으로 황태자가 이 권한을 위임받았다.[7]
314년, 유총은 정부를 개편하면서 한족과 비한족 간의 이중 행정 체제를 도입했는데, 이는 훗날 십육국 시대의 일부 국가에서 채택되었다. 그는 좌우 사예(司隸)를 두어 20만 가구의 한족을 관리하고, 좌우 부선우(副單于)를 두어 10만 부족을 다스리게 했다. 이들을 통칭하여 "육이(六夷)" 또는 "육만(六蠻)"이라고 불렀다. 현대 학자들은 오부(五部)와 추거(褚居) 분파 출신의 흉노는 "육이"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대신 한족의 일부로 행정 관리되었다고 지적한다.[10][11]
유총은 여러 명의 황후를 옹립하고, 외척과 환관의 정치 개입을 초래하여 문란한 정치를 횡행시켰다. 그는 황후 호연씨가 사망하자, 한인 명족 유윤의 딸 2명과 손녀 4명을 귀인으로 삼고, 상좌우 3황후 제도를 제정했으며, 근준의 딸을 상황후·우황후로 삼아 후궁을 확대했다. 그 결과 3명의 황후 외에 황후의 옥새를 가진 자가 7명에 달하는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12]
유요 시기에는 흉노 민족주의를 강화했지만, 한인 문화에도 이해를 보여 유교 학자들을 등용하고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그는 묵돌 선우를 하늘에 배향하여 흉노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대학·소학을 세우고 국자줏주·숭문줏주를 설치하여 한인 문화 흡수에도 힘썼다.[19]
한편, 전조(前趙)는 국가 내부에 신종 관계에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조의 협력자에 지나지 않는 독립 세력(석륵, 왕미, 조억 등)을 안고 있는 느슨한 연합 국가였으며, 석륵 등이 중앙의 통제 하에 복종한 적은 없었다는 연구도 있다.[21]
5. 역대 황제
묘호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한(漢) (304년 ~ 319년) | ||||
고조 | 광문제 | 유연(劉淵) | 304년 ~ 310년 | 원희(元熙) 304년 ~ 308년 |
- | - | 유화(劉和) | 310년 | 없음 |
열종 | 소무제 | 유총(劉聰) | 310년 ~ 318년 | 광흥(光興) 310년 ~ 311년 |
- | 은제 | 유찬 | 318년 | 한창(漢昌) 318년 |
전조(前趙) (319년 ~ 329년) | ||||
- | - | 유요 | 318년 ~ 329년 | 광초(光初) 318년 ~ 329년 |
- | - | 유희(劉熙) | 329년 | 없음 |
유희는 유요의 태자였으며, 유요가 후조의 황제 석륵에게 사로잡히자 지도자 역할을 맡았지만, 황제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4]
서적
Zizhi Tongjian
[5]
논문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1979
[6]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7]
간행물
'"Materials on the history of nomadic peoples in China. 3rd – 5th cc. AD. Issue 2. Jie"'
Moscow, Oriental Literature
[8]
간행물
"〈魏晋杂胡考 一 屠各〉"
Commercial Press
2010-12
[9]
웹사이트
去卑监国的败局与屠各刘豹的崛起
http://www.wenxue100[...]
2023-10-10
[10]
서적
《中国古代民族史研究》
People's Press (Beijing)
1987-07
[11]
서적
《魏晋南北朝兵制研究》
Elephant Press
1998-05
[12]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3]
논문
後趙建国前夜―匈奴漢国家体制試論
2020
[14]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5]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6]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7]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8]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19]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20]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21]
논문
後趙建国前夜―匈奴漢国家体制試論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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